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서 왕 (문단 편집) === 아서 왕의 역사적 시대 배경 === [[아서 왕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시기의 역사는 [[로마 제국]]의 약화된 [[로만 브리튼 이후]]로 로마 군단이 철수한 5, 6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영국사에서도 이 당시의 역사서나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모든 사건은 이후의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 앵글로색슨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역사 기록을 남길 정도로 문명화되는 [[8세기|8세기 말]]이 되면 이와 반대로 사료가 너무 많아져서 아서의 모델이 되는 여러 인물들을 추정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include(틀: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브리튼]] [[속주]] 로마군은 [[407년]], 일부 수비군만을 남기고 갈리아로 출정을 떠나 [[갈리아]]를 점령했으나 이후 군사적 좌절이 계속되며 브리튼을 방치했고 [[ 410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브리타니아로 편지를 보내 스스로를 지키라고 명령하며 [[로만 브리튼]] 시대는 막을 내렸다. 결국 갈리아의 브리튼 속주 로마군은 전멸당해 브라타니아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로마 본토 역시 [[게르만족]]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다. 로마 군단이 철수한 힘의 공백 아래 로마화된 켈트족, 즉 [[브리튼인]]들은 야인(野人) 켈트계인 [[픽트족]], 게일족, 스코트족의 잦은 약탈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당하게되었고 이후 주트족, 색슨족, 앵글로족, 프리시족 등 [[게르만]]계 부족들까지 [[북해]]를 건너오면서 브리타니아 섬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영국 수도사 길다스(Gildas)의 기록에 따르면 보티게른(Vortigern)이 425년부터 30여 년 동안 브리튼을 통치했다고 한다. [[보티건]](Vortigern)은 길도(Gildas)와 비드(Bede)의 기록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여기선 왕이 아니라 [[참주]]로 나왔는데, 고유이름이기 보다는 족장이나 왕을 뜻하는 보통명사일 수 있다고 한다. [[446년]], [[보티건]]은 브리튼인들이 야인 켈트계인 픽트족들에게 남침을 받게 되자 [[게르만]]계 주트족 용병들은 고용해 이를 물리졌다. 이후 [[용병]]들은 돌아가지않고 브리튼에 정착했고 분쟁이 일어나자 [[보티건]]은 주트족과 동맹을 맺고 영토를 분할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렇게해서 [[켄트 왕국]]이 세워지자 이어서 색슨족들도 밀려들어와 서식스왕국, 웨섹스왕국, 에식스왕국을 건립하였고 이와 함께 앵글로족도 머시아왕국, 이스트 앵글리아왕국, 노섬브리아왕국을 건국하여 앵글로색슨 [[7왕국]]이 세워졌다. 5세기 이후 앵글로족이 또다시 대규모로 브리타니아로 이주했고 시간이 흐르며 색슨족도 저지독일어 대신 앵글로 족의 [[고대 영어]]를 사용하며 [[앵글로 색슨]]족은 함께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후에 9~10세기 경 이들 주도로 통일국가를 이루어 '[[잉글랜드]]'가 되었다. [[앵글로색슨 7왕국]]의 건립은 4 ~ 6세기 300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었던 [[게르만족의 대이동|게르만족 대이동]] 물결의 일부였다. 이 7왕국은 8세기가 되면서 3개의 왕국(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식스)으로, 9세기에는 하나의 왕국 [[웨식스]]로 통합되었다. [[켄트 왕국]]이 세워지며 그곳에 살던 [[브리튼인]]들은 쫒겨나게 되었고, 이후 다른 게르만계인 색슨족과 앵글로족이 들어와 국가를 세우면서 브리튼인들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브리튼인들은 저항했으나 [[6세기]]경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페스트]]로 추정되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상륙하면서 크게 좌절되었으며, 이미 구 브리타니아의 수도 론디니움(Londinium, 현재의 런던)은 전쟁터가 되어 수도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The last days of Londinium". Museum of Londo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8 January 2009. Retrieved 31 March 2013.]. 전쟁은 7~8세기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정리된다. [[로만 브리튼]]인들은 서쪽의 [[웨일스]]로 밀려났으며 대륙으로 건너간 브리튼인 일부는 대륙으로 건너가 [[브르타뉴]](Britany)라는 왕국을 세웠다. 동쪽에 남아있던 브리튼인들의 경우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다가 동화되었다. '''최후의 승자는 [[앵글로색슨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서 왕 전설의 결말이 브리튼인들의 동족상잔과 아서 왕국의 몰락으로 끝나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서 왕 전설 역시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잉글랜드는 후에 [[노르만족]]의 침입과 지배를 받게 되지만 노르만족 역시 점차 앵글로색슨족에 동화되면서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현대의 [[윈저 왕조]]에 이르기까지 앵글로색슨(게르만 계열)이었다. 예외적으로 [[튜더 왕조]]는 [[브리튼]]([[웨일스]]) 계열이다.[* 그래서 튜더 왕조 시기에 유독 아서 왕과 튜더 왕가를 엮는 시도가 잦았다.]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는 자신의 장남의 이름을 아서로 짓기도 했다. 그러므로 사실 현대 영국인과 영국 왕실은 앵글로색슨, 노르만, 브리튼의 피가 모두 섞였다고 볼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nsbruck_1_262.jpg|width=100%]]}}} || || '''{{{#fff 1520년대에 만들어진 아서의 동상[* 고증에 맞지 않게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다.] }}}''' || 아서 왕의 초기 모델은 이런 혼란스러웠던 [[브리튼]]의 상황 속에서, 이민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브리튼인들을 일시적으로나마 구원한 "어떤 브리튼인 영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어지고 있다. 실제로 '''바돈 산의 전투''' 등 앵글로색슨족의 공세가 한 세대 정도 극도로 위축되었던 정황이 기록 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러한 인물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설에 근거해서 여러 인물들이 아서 왕의 모델이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그런 인물의 존재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하지가 않다. 아서 왕의 시대를 살아간 길다스 사피엔스(500?~570?)의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 길다스가 쓴 것인지도 확실치 않고 추정이다.]이 당대 유일한 기록이나 어디에도 '아서 왕'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서 왕보다 2세기 후의 《브리튼 부족사》에서야 최초로 '앵글로색슨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령관 아서'가 등장하지만 그러나 그마저도 '왕'이 아닌 전투지휘관이며, 200년 후의 기록이라는 점을 보면 그다지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하기가 어렵다. 6세기경 '''바돈 산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은 앵글로색슨족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로 인해 적어도 100년 이상 앵글로색슨족의 공세가 위축되었다'''는 것은 실제 상황이나, 이 당시의 지휘관이 누구인지는 고사하고 전투가 벌어진 바돈 산이 어디인지조차 알 방법이 전혀없다.[* 일단 후보가 되는 지역은 여럿 있는 모양이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아서 왕이 실제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가 부족한 고대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 "6세기 중반 아서 라는 지도자가 앵글로색슨족을 막아냈다"는 이야기 자체는 완전 허구만은 아니다. 우선 [[브리튼인]]들의 6세기경 지휘관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앵글로색슨족의 공세를 '''100년 이상이나 늦춘''' 대승을 거두었다. 또 이 무렵 다른 기록에서도 '아서'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즉,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짓는 당대의 유행을 감안한다면 바돈 산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의 이름이 혹시 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심증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아서라는 이름은 켈트어 아츠(arz)에서 온 것으로 이는 왕이라는 뜻을 가지니 아무래도 어떤 특정인의 이름이기보다는 지도자, 왕을 뜻하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아서 왕은 [[브리튼인]]들의 왕이면서, 동시에 [[앵글로색슨]]족에게도 전설의 왕이었으며, [[노르만]]족들에게도 전설의 왕으로 [[영국 ]]역사 내내 [[영국]]의 왕으로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앵글로색슨]]족이 아서 왕을 받아들인 이유는 [[바이킹]] 시대에 브리튼인들과 비슷한 [[동병상련]]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유독 한국에서 나돌아다니는 경향이 있는데,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만족이나 바이킹이나 같은 게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애초에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수백 년 가까이의 혼혈로 인해 그냥 프랑스인과 다를 게 없었고, 영국을 침공한 사람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모집된 용병들이었기에 영국의 노르만족들은 바이킹은 커녕 그냥 전형적인 라틴족이었다. 윌리엄부터가 흑발머리이기도 했고.], [[노르만족]]이 역시 스스로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서 왕 전설]]을 다시 끄집어 내서 중세시대에는 잊혀졌던 아서왕의 신화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고[* 영국을 침공했던 [[노르만족]]들 1/3 가까이가 앵글로색슨족들에게 쫒겨나 프랑스 서북쪽에 정착한 [[브리튼인]]의 후손인 [[브르타뉴]]계 용병들이기도 했고, 앵글로색슨족들의 저항 때문에 통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노르만족들은 [[브르타뉴]]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아서 왕의 신화를 이용해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브리타니아]]의 후손이고 너희들은 침략자들의 후손이라며 [[선전]]했다. 후에 [[플랜태저넷 왕조]]가 들어서고는 아예 민중들한테 프랑스어를 강요하기에 이르고,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형태의 아서왕 전설도 본격적으로 퍼지게 된다. 이러한 노골적인 앵글로색슨 정체성 탄압이 수백 년 가까이 지속되었기에 유일하게 사본이 남아있던 [[베오울프]]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대 영어 문학들이 결국 소실되어 버렸다. 그래서 [[톨킨]]도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다르게 영국(England)에는 자랑할 만한 고유한 신화가 없다고 한탄하였고, 그래서 쓴 작품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다.], 반대로 알프레드 대왕같은 앵글로색슨 인물들이 잊혀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알프레드 대왕의 행적 자체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아 그 행적이 아서왕 신화에 흡수되었고 그렇기에 아서 왕과 알프레드 대왕의 행적은 비슷한 면이 상당히 많다. 즉,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서 왕 전설 역시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걸 바이킹 시대와 연관 지어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영어로 구글링해보면 대부분 앵글로색슨 시기가 아닌 [[노르만 정복]] 이후로 영국에 다시 켈트 문화가 꽃 피웠다고 언급된다. [[https://www.bbc.co.uk/history/ancient/anglo_saxons/arthur_01.shtml|참조]]]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영국의 많은 사람들은 아서 왕을 영국을 지켜주는 전설의 주인공으로 생각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